10. 임시 요새 포병 주문하다(수비대)
메이지 40년(1907), 즉 광무 11년 7월 21일, 군방왕 이척(君邦, 순종황제 성), 전 황제 이재황, 광무왕. 황제의 명복을 받아 왕위에 올랐고, 8월 3일 용희(隆熙)라는 병원을 개업하고 윤의 부인을 황후로 승격시키고 여동생인 은왕(垠)을 영친왕으로 삼았다. 왕자.
이와 동시에 일한신협정이 체결되어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 부통령에 소네 아라스케, 사무총장에 츠루하라 사다키치의 권한을 확대했다. 츠루하라 박사 외 2명의 참가관 외에 일본인 전원이 차관으로 한국 내각과 각 관청에 추천되었고, 경무부와 이사청 소속 경찰관 1,000여명이 한국의 관직으로 전출되었고, 일본인 주민에 대한 경찰권 집행 한국 정부에 맡겨 국가로서 수행할 관리 장치가 완성되고 여기저기서 항의 집단이 나타나 일본인을 죽이고 총리를 약탈한다. 요새화 포병 중대가 마산에 와서 일시적으로 방어했고, 위험에서 벗어날 때까지 한 달 동안 싸웠다.
11. 결제시가의 명칭
마산의 외국인 거류지는 메이지 39년(1906년) 추석을 전후해 발전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41년(1908년) 늦봄이 되자 간선도로를 따라 러시아인 소유의 땅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실이 없었다. 도로.
무엇보다 좁은 면적에 5~6채의 임대주택이 있고, 주소가 대략적으로 A, B로 표기되어 있어 우편배달, 경찰의 인구조사, 민단에서의 정책집행이 빠릅니다. 이 부족하다는 등의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4월 23일 화해지부장 미마스는 미야가와 경찰서장, 도조 겐타로 우체부장 마에다, 지방의회 의원 유지와 함께 관저 지부에서 회동하여 거리. .
그리하여 정착지의 동서로 달리는 길이 본선이 되고, 남북을 잇는 도로를 부선으로 삼아 두 개로 나누어 각 본선에 속하는 마을 이름을 짓게 되었으며, 심지어 남복까지 이름을 붙였다. 본선에 속하지 않는 -ro를 따로 명명하였다. 이 지역은 11개 지역으로 나뉘었습니다.
이에 각각 좋은 한자를 하나씩 골라 넓은 동네를 정목(丁目, 초메)으로 나누고, 숫자를 적고, 동네(町, 마을)를 마치로 읽기로 했다. 마을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혼마치(本町, 월남동) 1-5초세, 교마치(京町, 두월동) 1-3초세, 하마마치(濱町, 창포동) 1-3초세, 아케보노마치(曙町, 청계동), 고토부키 -마치마치(수성동), 토모에마치(巴町, 대외동), 미도리마치(綠町, 유록동),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 야나기마치(柳町) , 신창동), 아사히마치(旭町, 평화동), 사쿠라마치(櫻町, 문화동)
이 협정은 즉시 실행되었고 민단에서는 각 마을과 각 쵸메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나무판을 못으로 박았습니다. 정착지에서는 벚나무 묘목 5,000그루를 구입하여 가로로 4칸 간격으로 옮겨 심었는데,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물도 비료도 주지 않고 시들게 하였다.
게다가 뿌리깊은 나무마저도 공덕이 없는 행인들에 의해 베어져 지금은 대곡천 양쪽 철조망 안에만 남아 있다.<<
이 글은 창원시립연구원이 2021년 번역한 『마산항』(1926) 45번째 글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됩니다. 『마산교선』은 1900년대에 출간된 일본문학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책으로 평가된다. 저자는 앞서 간행된 『마산繁昌記』과 같은 스와시로(諏方史郞)이다. 이 게시물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립연구원의 승인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